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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1)를 원한 ‘프리다’

 

2015-08-21, 20:51  기자: 이하은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 ‘프리다’와 ‘디에고’

 

여동생을 사랑한 남편

 

 

멕시코의 대표적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 그녀의 이름은 평범한 사진사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프리다는 평화로운 삶을 살지만은 않았다.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쇠약해지는 장애가 생겼고, 이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8세 때 교통사고는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 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었다. 프리다의 작품세계의 주요 주제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인데, 이 사고가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남편의 외도는 끝이 없었고, 급기야 자신의 여동생과도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믿고 의지했던 남편의 배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프리다는 그녀의 정신적 고통도 예술로 승화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몇 개의 작은 상처들》(1935)이 남아 있기도 하다. 디에고에 대한 실망과 배신 그리고 분노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또다른 점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선천적인 골반기형 때문이었고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1932), 《나의 탄생》(1932), 《프리다와 유산》(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우상

 

국보로 지정된 그녀의 작품

 

 

프리다의 삶은 매우 굴곡적이었으며, 그녀는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지만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전통적인 관습은 거부했다.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다시금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기까지 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높이 평가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내 경험을 그린 현실"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던 프리다는 200여점을 세상에 남겼다. 회화 143점 중 55점이 자화상인데, 그녀의 작품들은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남편 리베라 때문에 겪은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특히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한 자화상이 많다. 항상 유명한 남편 디에고의 그림자에 가려져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지냈지만 사후에는 남편인 디에고보다 명성이 높아졌고 1980년대 후반에는 마돈나가 좋아하는 화가로도 유명해졌다. 

 

사랑의 믿음에 대한 배신, 남에게는 당연했던 건강한 신체에 대한 욕구와 슬픔. 이 모든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킨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 그녀에게 아마도 삶은 고통, 그림은 탈출구, 죽음은 해방이 아니었을까.

 

 

 

1)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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